본문 바로가기
고전, 스크린을 만나다

영화 '폭풍의 언덕' 살펴보기 –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캐릭터, 복수의 정당성으로 읽는 파괴적 열정

by finderlog 2026. 2. 20.
반응형

"나는 히스클리프예요! 그는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요."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에 쓴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너무 폭력적이고 너무 열정적이며 또 너무 어두웠습니다. 비평가들은 충격받았고 독자들은 불편해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폭풍의 언덕은 세계 문학의 고전 반열에 올랐습니다. 집시 고아였던 히스클리프와 지주의 딸이었던 캐서린은 어린 시절 함께 자랐지만, 캐서린은 부유한 에드거 린턴과 결혼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떠났다가 부자가 되어 돌아왔고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원작에서는 두 세대에 걸친 이야기로 복수와 증오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다 젊은 캐시와 해리턴의 사랑으로 저주가 끊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이 구조를 단순화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첫 세대에 집중했습니다. 180년의 시간 동안 폭풍의 언덕은 여러 번 영화화됐습니다. 1939년 로렌스 올리비에와 멀 오버론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로맨틱했고, 1992년 레이프 파인즈와 줄리엣 비노쉬는 어둡고 폭력적이었으며, 2011년 제임스 하울슨과 카야 스코델라리오는 야성적이고 본능적이었고, 2026년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는 감각적이고 육체적입니다. 히스클리프는 로맨틱 히어로에서 복수에 미친 괴물이 됐다가 계급의 희생자가 됐고 이제는 욕망의 화신이 됐습니다. 캐서린은 수동적 여주인공에서 자기 파괴적 여성이 됐고 이제는 능동적으로 욕망하는 주체가 됐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인가, 집착인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1. 히스클리프의 얼굴 - 로맨틱 히어로에서 욕망의 화신으로

로렌스 올리비에의 히스클리프(1939)는 할리우드가 만든 로맨틱 히어로였습니다. 잘생기고 우아하며 고통받는 연인이었던 그의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열렬히 사랑했고 그녀를 잃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할리우드 작품은 원작의 어둠을 많이 제거했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잔인한 복수, 이자벨라에 대한 학대, 다음 세대에 대한 조작. 이 모든 것이 축소되거나 생략됐습니다. 영화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원했고 히스클리프를 동정받을 만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올리비에의 히스클리프가 캐서린(멀 오버론)에게 "당신은 나를 죽였어요!"라고 외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워했고 절망했으며 사랑에 미쳤습니다. 영화의 결말도 원작과 달랐는데, 두 사람의 유령이 함께 황야를 걷는 장면으로 끝나며 할리우드 공식의 완벽한 비극적 로맨스를 완성했습니다. 레이프 파인즈의 히스클리프(1992)는 훨씬 어두웠습니다. 파인즈는 히스클리프의 폭력성과 잔인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자벨라(소피 워드)를 학대하는 장면, 해리턴을 타락시키는 장면, 캐서린의 무덤을 파헤치는 장면. 파인즈의 히스클리프는 동정받기 어려운 괴물이었지만, 동시에 계급의 희생자이자 학대받은 아이이자 사랑을 잃은 남자였습니다. 그의 복수는 정당하지 않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 파인즈와 비노쉬의 케미스트리는 강렬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폭력적이고 소유욕이 강하며 파괴적이었는데, 황야에서 키스하는 장면은 거칠었고 거의 싸움 같았습니다. 이것은 원작의 정신에 가까웠습니다.
제임스 하울슨의 히스클리프(2011)는 가장 야성적이었습니다. 안드레아 아널드 감독은 히스클리프를 흑인으로 캐스팅했는데, 원작의 "어두운 피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하울슨의 히스클리프는 거칠고 말이 적으며 거의 동물적이었습니다. 영화는 계급과 인종을 강조했습니다. 집시 고아로 피부색 때문에 학대받고 사회에서 배제된 히스클리프의 분노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것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카야 스코델라리오)은 어렸을 때부터 황야를 뛰어다니며 자연의 일부처럼 살았고, 그들의 사랑도 황야처럼 문명화되지 않고 본능적이었습니다. 하울슨의 히스클리프는 말보다 눈빛과 몸짓으로 연기했고, 그 침묵이 더 위압적이었습니다.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의 작품(2026)은 가장 도발적입니다. 에메랄드 펜넬 감독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육체적이고 감각적이며 거의 중독적으로 그렸습니다. 엘로디의 히스클리프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욕망하는 주체이고, 로비의 캐서린도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원하고 선택하며 갈등합니다. 평론가들의 반응은 양분됐습니다. 시각적으로 강렬하고 도발적이라는 호평도 있었지만, 두 주인공 사이의 케미스트리가 느껴지지 않고 관계의 깊이보다 시각적 자극에 치중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2. 캐서린의 선택 - 사랑인가 계급인가

원작에서 캐서린 언쇼는 폭풍의 언덕의 가장 복잡한 캐릭터입니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면서도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는 그녀는 말합니다.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는 나를 낮추는 거야." 계급을 선택한 이 결정이 결국 모두를 파괴하게 되지요. 멀 오버론의 캐서린은 전형적인 할리우드 여주인공이었습니다.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에드거와 결혼한 희생자로 그려졌고, 히스클리프를 여전히 사랑하는 그녀의 고통은 순수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 작품은 캐서린의 복잡성을 단순화했습니다. 원작의 캐서린은 이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자기파괴적인 인물이었지만, 영화는 단순히 불쌍한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줄리엣 비노쉬의 캐서린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히스클리프를 사랑하면서도 에드거의 부와 지위를 원했고, 둘 다 가지고 싶었습니다. 히스클리프에게 "나는 히스클리프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광적이었는데, 그녀는 거의 미친 것 같았고 히스클리프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히스클리프를 저주하고 함께 무덤에 있기를 원했던 비노쉬의 캐서린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카야 스코델라리오의 캐서린은 가장 야생적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히스클리프와 황야를 뛰어다니며 사회적 규칙을 무시했지만, 에드거의 부드러움과 교양에 매료되어 문명을 선택했습니다. 아널드 작품은 이 선택을 비판적으로 그렸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배신하고 히스클리프를 배신한 캐서린이 결국 자신을 파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고 로비의 캐서린은 가장 능동적입니다. 펜넬 감독은 캐서린을 희생자나 변덕쟁이가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아는 현대적 여성으로 재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이것이 원작의 정신을 잃었다고 비판합니다. 원작의 캐서린은 빅토리아 시대의 제약에 갇힌 비극적 인물이었고, 그 제약이 그녀를 파괴했습니다.

3. 복수의 정당성 - 정당한 분노인가 병적 집착인가

폭풍의 언덕의 후반부는 복수에 관한 것입니다.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힌들리를 파멸시키고 이자벨라를 학대하고 해리턴을 타락시키며 젊은 캐시를 감금합니다. 냉혹하고 체계적이며 무자비한 복수입니다. 1939년 작품은 이 복수를 대부분 생략했습니다. 히스클리프를 로맨틱 히어로로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올리비에의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하지만 거의 방어적으로 보였고, 영화는 그를 동정하는 시선이었습니다. 1992년 작품은 복수를 정면으로 다뤘습니다. 파인즈의 히스클리프는 이자벨라를 유혹하고 결혼한 후 학대했으며, 힌들리(제레미 노섬)를 도박과 술로 서서히 파멸시켰습니다. 이 작품이 던진 질문은 날카로웠습니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정당한가? 그는 학대받고 사랑을 잃어 고통받았지만, 그의 복수는 무고한 이자벨라와 젊은 세대까지 파괴했습니다. 2011년 작품은 복수를 구조적 문제로 그렸습니다. 계급과 인종의 희생자였던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복수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폭풍의 언덕과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모두 소유했지만 히스클리프는 여전히 불행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캐서린은 없었습니다. 2026년 작품은 복수를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펜넬 감독은 두 번째 세대 서사를 생략하고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에 집중했습니다. 욕망을 강조하는 의도적 선택이었지만, 원작에서 복수는 사랑만큼 중요한 축인데, 그것을 생략함으로써 이 작품은 원작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마치며 - 황야에 남은 질문들

에밀리 브론테는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위대한지 병적인지, 복수가 정당한지 광기인지. 그동안의 영화들도 명확히 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요점일지도 모릅니다. 폭풍의 언덕은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요크셔 황야는 여전히 거기 있고, 바람은 여전히 불며,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유령은 여전히 떠돕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이해하려 합니다. 이것이 사랑인지, 광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