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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스크린을 만나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 배신의 표현, 완벽한 복수, 그리고 용서의 가능성을 세 편의 영화로 읽다

by finderlog 2026.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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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 and hope." 기다리고 희망하라. 1844년, 알렉상드르 뒤마는 신문 연재소설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썼습니다. 젊은 선원 에드몽 당테스는 선장 승진을 앞두고 메르세데스와 결혼을 준비하던 행복한 청년이었지만, 결혼식 날 갑자기 체포됐습니다. 그를 배신한 것은 세 명이었습니다. 메르세데스를 탐낸 사촌 페르낭, 질투에 눈먼 동료 당글라르, 자신의 비밀을 지키려는 검사 빌포르. 에드몽은 재판도 없이 샤토 디프 감옥에 갇혔고 14년을 보낸 끝에 파리아 신부를 만나 지혜와 보물의 위치를 전수받았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하여 파리로 돌아왔고 배신자들을 하나씩 냉혹하게 파괴했습니다. 하지만 복수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다쳤고 에드몽 자신도 변했으며, 메르세데스는 그를 알아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에드몽이 아니에요." 180년 동안 영화들은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복수는 정당한가? 1934년 로버트 도넛은 복수를 모험으로 만들었고, 2002년 짐 카비젤은 액션으로 만들었으며, 2024년 피에르 니네는 비극으로 만들었습니다. 에드몽은 영웅에서 안티히어로가 됐고, 복수는 정의에서 집착이 됐으며, 질문은 점점 더 어두워졌습니다. 복수 후에 무엇이 남는가? 그리고 용서는 가능한가?

몬테크리스토 백작, 복수의 끝에 선 남자
몬테크리스토 백작, 복수의 끝에 선 남자

1. 에드몽 당테스의 몰락 - 배신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로버트 도넛의 에드몽(1934)은 순수했습니다. 롤랜드 V. 리 감독의 작품에서 도넛은 잘생기고 용감하며 메르세데스(엘리사 란디)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낭만적 영웅으로 그려졌습니다. 배신은 갑작스러웠습니다. 질투한 페르낭(시드니 블랙머)과 탐욕스러운 당글라르, 아버지의 비밀을 지키려 한 빌포르 검사가 공모하여 에드몽을 재판도 없이 샤토 디프로 보냈습니다. 이 영화는 감옥에서의 고문과 절망을 자세히 보여주기보다 에드몽이 파리아 신부(O.P. 헤기)를 만나 지혜를 얻는 과정에 집중했습니다. 탈출 후에도 도넛의 에드몽은 고결했습니다. 그는 배신자들을 폭로하고 정의를 구현했지만 과도하게 잔인하지 않았는데, 악당은 벌 받되 영웅은 고결해야 한다는 1930년대 할리우드의 공식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짐 카비젤의 에드몽(2002)은 더 현대적이었습니다.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할리우드 작품에서 카비젤은 선장 대리로 메르세데스(다그마라 도민칙)를 사랑하며 미래를 꿈꾸는 순진한 청년을 연기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신자는 한 명으로 압축됐습니다. 에드몽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페르낭(가이 피어스)이 유일한 주요 악당이 됐는데, 적의 배신보다 친구의 배신이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서 이 선택은 효과적이었습니다. 감옥 장면은 액션 영화처럼 전개됐고 탈출은 스펙터클 했으며, 에드몽이 수염과 옷과 매너를 바꾸며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몽타주로 처리됐습니다. 파리아 신부(리처드 해리스)는 그에게 검술과 역사, 철학을 가르치면서도 경고했습니다. "복수를 추구하면 두 개의 무덤을 파야 한다." 피에르 니네의 에드몽(2024)은 가장 어두웠습니다. 마티유 드라브르와 알렉상드르 드 라 파텔리에르 감독의 프랑스 작품은 원작에 가장 충실하게 배신의 잔인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니네의 에드몽은 특별히 영웅적이지도,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은 그냥 행복한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몰락이 더 사실적이고도 비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페르낭(바스티앙 부용), 당글라르(파트릭 미유), 빌포르(로랑 라피트), 세 명 모두가 각자 다른 이유로 에드몽을 파괴했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득을 챙겼습니다. 14년의 감옥은 실제로 느껴졌습니다. 니네의 에드몽은 말라갔고 미쳐갔으며 거의 인간성을 잃었습니다. 파리아 신부(피에르폰시오 카스틸론)는 그를 구해냈는데, 이 작품의 신부는 복수를 경고하는 대신 오히려 정교하게 계획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기다리고 희망하라. 그리고 준비하라."

2. 복수의 계획 -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탄생

몬테크리스토 백작은 에드몽 당테스가 아닙니다. 그는 신비로운 이탈리아 귀족으로 무한한 부와 불명확한 과거를 가졌으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입니다. 파리 사교계에 나타나 모두를 매혹시키지만 아무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1934년 도넛의 몬테크리스토는 우아했습니다. 완벽한 매너와 지성, 넘치는 카리스마를 갖춘 그는 거의 초인적으로 그려졌습니다. 모든 것을 예측하고 모든 상황을 통제하며 실수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복수는 정의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배신자들을 폭로하고 증거를 제시하며 법이 그들을 처벌하게 했는데, 복수라기보다는 정의 구현에 가까웠습니다. 도넛의 몬테크리스토는 메르세데스를 여전히 사랑했고, 그녀가 페르낭과 결혼했음에도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녀를 구하려 했습니다. 2002년 카비젤의 몬테크리스토는 더 액션 히어로 같았습니다. 검술 달인이자 부유한 귀족으로 정교한 복수를 계획하는 인물이었지만, 이 영화는 페르낭 한 명에게 집중하며 복수를 단순화했습니다. 다른 배신자들은 최소화되거나 삭제됐고, 에드몽 대 페르낭의 개인적 대결이 중심이 됐습니다. 친구의 배신, 여자를 둘러싼 경쟁, 명예를 건 결투. 이 영화에서 중요한 서사적 변화는 메르세데스와 에드몽의 아들 알베르(헨리 카빌)의 등장이었습니다. 알베르는 페르낭이 아버지라 믿었지만 사실 에드몽의 아들이었고, 몬테크리스토가 자신의 아들인 줄 모르고 복수를 향해 달려갈 때 메르세데스가 진실을 밝혔습니다. 복수의 대가가 자신의 아들을 파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이었습니다. 2024년 니네의 몬테크리스토는 가장 복잡했습니다. 니네는 그를 차갑고 계산적이며 거의 악당에 가깝게 연기했습니다. 14년의 감옥과 복수의 집착이 에드몽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 작품은 원작처럼 세 배신자 모두를 다뤘습니다. 당글라르에게는 재정적 파멸을, 페르낭에게는 명예의 파괴를, 빌포르에게는 가족의 붕괴를 계획했고, 무고한 사람들이 다쳐도 개의치 않는 무자비한 모습이었습니다. 메르세데스가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찾아왔을 때, 그는 냉혹하게 말했습니다. "에드몽 당테스는 죽었습니다. 샤토 디프에서."

3. 복수의 집행 - 신의 정의인가, 인간의 광기인가

원작에서 몬테크리스토는 자신을 "섭리의 도구"라고 부릅니다. 신이 자신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니면 그저 복수에 미친 사람일까요? 1934년 작품의 복수는 정당했습니다. 배신자들은 악했고 몬테크리스토는 선했으며 정의가 승리했습니다. 페르낭은 폭로됐고, 당글라르는 파산했으며, 빌포르는 실각했습니다. 몬테크리스토는 복수를 성취하고도 인간성을 잃지 않았고 사랑을 되찾았으며 미래가 있었습니다. 정의는 존재하고 복수는 가능하며 행복도 가능하다는 위안을 관객에게 건네는 영화였습니다. 2002년 작품의 복수는 극적이었습니다. 몬테크리스토가 페르낭의 전쟁 중 배신 사실을 폭로하자 사교계는 그를 거부했고, 두 사람의 마지막 대결은 저택에서의 검 결투로 이어졌습니다. 죽기 전 페르낭이 내뱉은 "나는 네가 부러웠어. 항상." 이 대사는 악당에게도 동기와 고통이 있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결말에서 몬테크리스토는 자신의 아들을 찾고 메르세데스와 재결합하며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사랑, 가족, 용서의 해피엔딩은 원작과 달랐습니다. 2024년 영화에서 복수는 가장 어두웠습니다. 당글라르의 은행을 파산시켜 거지로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가족까지 파괴했고, 페르낭의 아들 알베르가 아버지를 경멸하게 만든 끝에 페르낭은 자살했으며, 빌포르의 가족 비밀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들이 죽고 빌포르는 미쳐버렸습니다. 몬테크리스토는 이 모든 과정을 냉정하게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아이가 죽었을 때는 그도 자신의 복수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신의 도구가 아니라 복수에 잠식된 괴물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메르세데스가 늙고 지친 얼굴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복수를 선택했어요.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4. 복수 후에 남는 것 - "기다리고 희망하라"

알렉상드르 뒤마는 187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백 권의 책을 쓰고 모험과 여행을 사랑하며 인생을 충만하게 살았던 뒤마 자신도 배신을 경험했습니다. 아이티 노예 출신 할머니를 둔 혼혈이었던 그는 인종 차별을 받았고 군 경력에서 승진을 거부당했습니다. 몬테크리스토는 어쩌면 그의 복수 판타지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는 다소 복잡합니다. 몬테크리스토는 복수를 성취했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메르세데스를 잃었고, 젊은 연인 에데와 함께 떠나지만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마지막 말은 "기다리고 희망하라"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용서인가, 평화인가, 잊혀짐인가. 세 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습니다. 1934년 작품은 정의와 사랑이 남는다고 했고, 2002년 영화는 가족과 미래가 남는다고 했으며, 2024년 작품은 공허함과 후회가 남는다고 했습니다. 어느 것이 진실인가는 관점의 문제이지만, 어쩌면 셋 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선택에 따라. 우리는 왜 여전히 몬테크리스토를 보는가? 아마도 우리도 배신당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친구에게, 연인에게, 시스템에게. 우리는 정의를 원하고 복수를 꿈꾸며 배신자들이 벌 받기를 바랍니다. 몬테크리스토는 그 판타지를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2024년 작품이 보여주듯, 복수는 에드몽 당테스를 죽이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남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복수를 마친 끝은 행복인가? 샤토 디프는 지금도 마르세유 앞바다에 있습니다. 감옥은 이제 박물관이 됐고, 관광객들은 에드몽의 감방과 파리아 신부의 터널, 탈출 창문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14년의 감옥, 배신, 복수의 기회. 메르세데스는 몬테크리스토에게 말했습니다. "신은 용서합니다. 인간만이 복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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